패션계에서 '앙팡 테리블'이라고 불리던 대표적인 디자이너로 장 폴 고티에와 알렉산더 맥퀸을 꼽을 수 있다. "쇼는 재밌어야 한다"는 철학으로 매번 패션계를 놀라게 했던 영국의 악동 알렉산더 맥퀸. 2010년 우울증으로 자살을 하기 전까지 매해 파격적이고도 아름다운 의상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의 실험적이고 창조적인 디자인은 옷에 대한 모독인지, 그가 천재인지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실험적인 의상으로 주목받는 팝스타 레이디 가가 또한 그의 의상을 즐겨 입곤 했다.
이른 나이에 단절한 천재와 그의 브랜드
2010년 2월 11일, 전 세계의 각종 언론들은 충격적인 소식을 보도했다. 현대 패션계를 이끌어가던 디자이너 중 한 명인 알렉산더 맥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존경받는 디자이너이자 동시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천재적인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은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일까.
영국 런던의 평범하고 검소한 가정에서 자란 알렉산더 맥퀸은 가족 중 누구도 예술 계통의 사람이 없었지만 그는 어릴 적부터 패션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어릴 적부터 여동생을 위한 드레스를 만드는걸 즐겼으며 학교에 패션 화보집을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 그를 친구들은 맥퀴어(McQueer; 동성애자)라고 놀리며 비웃었다. 16세 때,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웨스트햄프턴 기술 전문대학의 예술 과정 야간학부를 이수했다. 그 후 고급 양복점이 즐비한 런던의 세빌 거리의 양복점에서 견습공으로 일하며 옷 만드는 실력을 쌓아갔다. 특히 뮤지컬 의상을 제작하던 앤젤스 앤 버먼스에서는 16세기의 드라마틱한 의상을 만들며 6개월간 패턴과 재단 기술을 마스터했다. 그 밖에도 밀라노에서 로맨틱한 디자인으로 사랑받는 로메오 질리(Romeo Gigli)의 어시스턴트가 되어 다양한 기술을 습득해 나갔다. 하지만 자신의 브랜드를 만든 것은 학위를 따고 난 후였다. 세인트 마틴의 강사 자리에 지원하러 갔던 맥퀸은 오히려 센트럴 세인트 마틴(Central Saint Martins)에서 패션 디자인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때 선보인 대학원 졸업 컬렉션에서 알렉산더 맥퀸이 패션계의 주목을 받게 도는 일생일대의 일이 벌어진다. 영국의 유명한 패션 에디터이자 스타일 아이콘이었던 이사벨라 블로우(Isabella Blow)가 졸업 컬렉션을 보러 왔다가 맥퀸의 컬렉션을 보고 한눈에 반하고 만 것이다. 이사벨라는 맥퀸의 전체 컬렉션을 몽땅 구입하기로 하며 언론은 알렉산더 맥퀸이라는 신인 디자이너에게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맥퀸은 더욱 주목받게 되었다. 이러한 주목 속에서 그는 곧 자신의 브랜드 '알레산더 맥퀸'을 론칭하게 된다. 브랜드 명을 그의 본명인 '리 맥퀸'이 아닌 중간 이름을 넣어서 '알렉산더 맥퀸'으로 정할 것을 조언해 준 사람도 이사벨라라고 한다. 졸업 컬렉션을 계기로 그 이후 15년간 오랜 우정을 이어오던 이사벨라와 맥퀸. 2007년 5월, 이사벨라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은 맥퀸을 순식간에 절망으로 빠뜨렸다.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2010년 2월 2일 맥퀸의 어머니 조이스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친구의 죽음에 이은 어머니의 죽음은 그를 깊은 슬픔과 혼란으로 몰아넣었고, 맥퀸은 불안증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너무나도 큰 외로움과 두려움을 결국 이겨내지 못한 맥퀸은 어머니의 장례식이 열리기 하루 전, 스스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짧은 생을 살다 간 맥퀸이지만, 다른 어떤 브랜드보다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지키며 우리에게 강렬한 메시지와 창의적인 컬렉션을 남기고 갔고 맥퀸이 없는 지금도 브랜드 정체성을 이어나가고 있다.
맥퀸의 극적이고 과장된 패션쇼
알렉산더 맥퀸만큼 파격적이고 눈에 익지 않은 의상을 만들어내는 디자이너도 찾아 보기 힘들다. 일반인들에게 그의 의상은 다소 공격적이고 극단적이며, 관습을 거부하는 거의 패션쇼 콘셉트는 종종 파장을 일으켰고 그 안에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고는 했다.
1994년 FW 컬렉션에서 맥퀸은 18세기 영국에 점령당한 스코틀랜드 고산 지방에서 스코틀랜드 여성들이 영국 병사들에게 강간 당한 사건을 주제로 한 '하이랜드 레이프(Highland Rape)' 컬렉션을 선보였다. 제국주의와 폭력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모델들에게 멍이 든 듯한 화장을 시키기도 하고, 임신한 여성을 표현한 모델이 나와 충격을 주었다. 당시 이로 인해 그는 여성혐오자라는 비판에 시달리기도 했다.
2005년 SS 컬렉션에서는 모델들을 체스의 말처럼 움직이게 한 인간 체스판을 표현해 관중의 극찬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1999년 SS 컬렉션의 엔딩은 오늘날까지도 가장 멋진 장면으로 손꼽힌다. 당시 하얀 민무늬 드레스를 입고 나온 모델 샬롬 할로우에게 양쪽에 세워진 로봇들이 드레스에 페인트를 분사하는 퍼포먼스는 모든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완성된 드레스를 입은 샬롬은 발레리나 같은 우아한 자태와 함께 내면이 채워진 듯한 충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것이 알렉산더 맥퀸의 상징과도 같은 '스프레이 페인트 드레스'다. 이것은 패션쇼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림과 동시에 첨단 기술과 인간, 패션이 공존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이런 그의 완벽한 테크닉과 천재적인 창의력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미워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의 유별난 성격은 맥퀸을 정의하는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패션계를 이끈 탑 디자이너
패션계에서 '역대 최고'를 논할 때 빠져서는 안될 인물 중 하나인 알렉산더 맥퀸. 자신의 브랜드 론칭 후 바로 엉덩이 선이 보일 만큼 허리선이 내려간 바지인 범스터 팬츠를 선보이고, 패션계에 큰 논란을 일으키며 자신의 시그니처 아이템을 탄생시킨 알렉산더 맥퀸은 다른 디자이너들과 비교도 안 될 짧은 커리어로도 이 리스트 안에 들었다. 1996년, LVMH에 의해 지방시의 디자이너가 되었던 맥퀸은 지방시와 함께하는 시간이 행복하지 않았다. 고상함의 끝을 달리는 지방시의 테두리 안에서 맥퀸의 파격적인 창의력은 구속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LVMH의 라이벌 PPR의 구찌가 알렉산더 맥퀸 브랜드의 지분 51퍼센트를 사들이면서 맥퀸은 다시 자신의 브랜드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맥퀸은 누구의 간섭 없이 오로지 자신의 브랜드에만 전념하며 자신의 창의력을 아낌없이 표현했다. 그리고 패션계를 이끌어가는 탑 디자이너들 중 한 명이 되어 그의 전성기를 누렸다. 2004년에는 남성복 라인을 론칭하고, 2006년에는 세컨드 브랜드 McQ을 론칭하기도 했다. 그는 올해의 영국 디자이너 상을 4번이나 수상했고 전 세계 주요 도시에 매장을 확장해 나가며 맥퀸의 전성시대를 누렸다.
그러나 그는 화려했던 르네상스와 비극적 슬픔을 모두 겪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남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천재이자 악동이었다. 패션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간 그의 이름은 패션사의 한 페이지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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