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에는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색상이 존재한다.' 이브 생 로랑은 미술 작품에 나타나는 색채의 이미지를 중시했고, 거기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는 무엇을 디자인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모든 것이 남들과 달랐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패션계를 진화시키고 혁명이 되었다. 이 예술을 사랑한 천재 디자이너를 프랑스인들은 존경했고, 패션계에 남긴 큰 업적으로 인해 그는 프랑스의 국가적 아이콘이 되었다. 패션사에 크나큰 돌풍을 일으켰던 이브 생 로랑과 그의 브랜드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디올이 지목한 후계자
1936년 프랑스 알제리의 지중해 마을에서 태어난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은 부유한 가정 속에서 자랐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아이였던 그는 연극이나 옷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운동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그러다 열한 살 때 가족들과 몰리에르의 연극을 보고 화려한 무대와 의상에 감명을 받고 디자이너의 꿈이 시작되었다. 그 후 그는 취미로 옷을 디자인하며 10대 시절을 보냈고, 1953년 국제 양모 사무국 디자인 콘테스트에 참가하게 된다. 이 콘테스트는 크리스찬 디올, 위베르 드 지방시 등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들이 심사위원으로 있는 경쟁력 있는 콘테스트였다. 이 대회에서 그는 3등을 차지하고, 패션지 '보그'의 편집장 미셀 드 브루노프를 만나게 되고 미셀은 그의 재능을 눈여겨보게 된다. 이브 생 로랑은 본격적으로 패션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파리의 의상 조합 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몇 달 만에 그만두고 1954년 다시 국제 양모 사무국 디자인 콘테스트에 참가해 드레스 부문에서 1등을 차지하고, 당시 라이벌이었던 칼 라거펠드는 코드 부문에서 1등을 했다. 그 후 그는 보그 편집장 미셀을 만나 자신의 새로운 스케치를 보여주게 되고 미셀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디자인이 디올의 것과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이다. 미셀의 소개로 이브 생 로랑은 디올을 만나게 되고, 그의 스케치를 본 디올 역시 그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렇게 해서 그는 고작 18세의 나이로 크리스찬 디올의 어시스턴트가 되었다. 디올의 부티크에서 일하며 학교에서 배울 수 없었던 많은 것을 익혀갔고, 디올과 이브 생 로랑은 완벽한 콤비를 이루어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성공적으로 치러 나갔다. 하지만 1957년, 크리스찬 디올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21세의 이브 생 로랑이 수석 디자이너를 맡아 디올 하우스를 이끌어 가게 되었다. 그가 이끄는 디올의 첫 컬렉션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알제리 독립 전쟁이 터졌고 1960년 그는 군에 입대하게 된다.
이브 생 로랑 하우스의 탄생과 그의 파격 행보
이브 생 로랑은 군에 입대한 지 3주 만에 신경쇠약으로 의가사 제대를 하게 되고, 정신 병원에서 각종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 사이 디올은 새로운 수석 디자이너를 뽑고 이브 생 로랑은 해고 소식을 듣게 된다. 디자이너의 자리를 빼앗겨 우울함과 좌절감에 빠져 있던 이브 생 로랑은 그의 연인 피에르 베르제의 도움으로 자신의 부티크를 열게 된다. 이렇게 1961년 9월, 이브 생 로랑 오트 쿠튀르 하우스가 프랑스 파리, 스폰티니가에 처음 탄생했다.
디올의 그늘을 벗어난 이브 생 로랑은 자유롭게 그만의 혁신적인 디자인을 선보였다. 이브 생 로랑은 매 컬렉션마다 패션사에 길이 남을 의상들을 수 없이 탄생시켰는데, 첫 컬렉션에서 눈에 띄었던 것은 카방이라 불리는 코트였다. 굵직한 직선 실루엣에 커다란 더블 단추가 특징인 코트로 프랑스 선원들이 즐겨 입는 코트에서 영감을 얻었다. 1965년 발표한 몬드리안 룩은 예술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옷으로 패션 사전에 등재될 만큼 유명하다. 그리고 1966년, 오늘날까지 이브 생 로랑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아이콘이자 시그니처가 된 '르 스모킹'이 탄생했다. 1960년대에 바지 정장이란 여성의 것이 될 수 없었고, 특히 세련된 멋이 나는 턱시도는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이브 생 로랑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남성의 턱시도를 변형시켜 여성용 바지 슈트로 만들었다. 이는 패션계의 거대한 혁명이었다. 지금껏 그 어떤 디자이너도 오직 여성만을 위한 바지 슈트를 세상에 내놓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브 생 로랑은 스커트만을 여성의 의복으로 여기던 고정관념을 깨트리며 여성에게 자유를 주었꼬, 남성들만이 입는 바지 정장을 여성들도 매일같이 일상복으로 입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더 진보한 남녀평등을 의미했다. 갈색 머리, 마른 체구에 안경 낀 내성적인 성격의 이브 생 로랑은 패션에 있어서만큼은 남들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과감한 시도로 패션사에 크나큰 돌풍을 일으켜 버렸다.
1960년대 패션계는 기성복 라인인 프레타 포르테가 파리의 오트 쿠튀르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당시 발렌시아가는 이런 세태를 지탄하며 은퇴를 선언했지만, 이브 생 로랑은 대세를 따라 프레타 포르테 라인인 '생 로랑 리브 고슈(Saint Laurent Rive Gauche)'를 론칭했다. 리브 고슈는 이후 이브 생 로랑 오트 쿠튀르 라인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정도로 성장했고, 오늘날 선보이고 있는 이브 생 로랑 역시 바로 이 리브 고슈 라인이다.
1970년대에도 이브 생 로랑은 파격 행보를 이어갔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그의 누드 사진이었다. 1971년 이브 생 로랑의 첫 번째 남성용 향수 YSL을 론칭했는데, 이때 향수 광고 포스터에 자신이 직접 누드모델로 등장한 것이었다. 1977년에 출시한 여성용 향수 또한 스캔들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이유는 여성용 향수 이름이 오퓸이었기 때문이다. 오품의 뜻은 아편으로, 19세기 중국에서 일어난 아편 전쟁을 경솔하게 이용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스캔들은 오퓸을 더 유명하게 만들어 상업적으로는 큰 성공을 이루게 되었다.
이슈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세계 최초로 흑인 모델을 패션쇼에 세운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이렇게 패션계의 괴짜이자 혁명가인 천재 디자이너를 사랑하는 이들이 많았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아트 박물관은 1983년 이브 생 로랑의 작품전을 열었는데, 이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살아 있는 디자이너의 전시회를 최초로 개최한 것이었다. 이것은 그만큼 이브 생 로랑의 의상이 현대 여성사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브 생 로랑 이후의 브랜드 이야기
1990년대가 되면서 다른 명품 브랜드들과 마찬가지로 이브 생 로랑도 위기를 겪게 되고 결국 회사 지분의 57%를 제약회사 엘프 사노피에 팔게 되었다. 그리고 2000년 PPR그룹이 이브 생 로랑 리브 고슈를 인수해 버렸다. 그에게 남은 건 오트 쿠튀르 라인 뿐이었다. 리브 고슈 라인은 톰 포드가 이끌며 특유의 섹시 감성을 선보였다. 그 후 스테파노 필라티가 이어받아 이브 생 로랑을 충실하게 계승했으며, 에디 슬리먼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오면서 이브 생 로랑 하우스의 느낌을 재현하며 쿠튀르를 부활시켰다. 그리고 2016년부터 안토니 바카렐로가 바통을 이어받아 현재까지 자신만의 패션 세계를 당당하게 표현하고 있다. 한편, 이브 생 로랑은 2002년 이브 생 로랑 하우스의 40주년을 기념하는 패션쇼를 마지막으로 은퇴하였다. 그리고 2008년 71세의 나이에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에는 프랑스 대통령과 영부인을 비롯한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참석했고, 많은 여성들이 그를 향한 존경심을 표하기 위해 그의 위대한 유산 바지 정장을 입고 함께 했다. 여성에게 자유를 입힌 패션 혁명가, 그만의 독특하고 매력적인 스타일로 '생 로랑 시크'라는 말까지 탄생시켰던 이브 생 로랑은 언제나 프랑스의 자존심이자 패션계의 전설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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