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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이야기

쿠튀리에가 만든 브랜드, 발렌시아가

by 마이빈 2022.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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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시아가의 코쿤 라인

 

 

  밀레니얼 세대의 열광과 지지를 받는 브랜드, 발렌시아가(Balenciaga). 발렌시아가는 언제부터 힙한 브랜드였을까? 모르는 사람들은 발렌시아가가 스트릿 감성이 가미된 럭셔리 브랜드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발렌시아가는 원래 아주 포멀하고 간결한 실루엣에서 시작한 브랜드였으며, 샤넬만큼 깊은 역사를 자랑한다. 알고 나면 더 재미있는 발렌시아가의 과거와 현재의 디자인 변천사를 알아보자.

 

발렌시아가 그 역사의 시작

 

  발렌시아가는 1859년 스페인의 어촌 마을에서 태어난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Cristobal Balenciaga)로부터 시작된 브랜드이다. 발렌시아가의 아버지는 어부였고, 어머니는 재봉사였는데 그는 늘 어머니의 일터에 놀러 가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다 어머니로부터 재봉일을 배우게 되었고 천부적인 실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렇게 열세 살이 되던 해 여름,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운명적인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휴양차 해변에 놀러 온 카사 토레스 후작 가족을 만나게 되고, 후작 부인의 오트 쿠틔르 드레스를 똑같이 만들어 온 그의 실력과 깔끔한 마감처리에 놀라 부티크에 추천을 해 주게 된다. 이렇게 해서 발렌시아가는 산 세바스찬에 있는 한 부티크에서 일을 하며 다양한 테일러링 기술을 익히고 디자이너로서의 꿈을 키워갔다. 이후 1919년 발렌시아가는 산 세바스찬에 자신의 부티크를 오픈했고, 어머니의 성을 따서 '에이사(Eisa)'라고 이름 지었다. 이어 1933년과 1935년에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도 샵을 차릴 정도로 크게 성장해 나갔다. 그는 강박적일 만큼 옷의 완성도에 집착하는 완벽주의자가 되어갔고, 뛰어난 테크닉과 완벽주의 덕분에 곧 스페인 최고의 디자이너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1937년 예기치 못한 스페인 내란이 일어나 부티크들은 강제로 문을 닫게 되었고, 발렌시아가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프랑스 파리로 진출하게 되었다. 그 당시 파리는 샤넬, 디올, 루이뷔통, 에르메스 등 패션 하우스들을 비롯하여 패션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도시였다.  또 프랑스 정부는 의류 수출로 인한 수입이 막대했기 때문에 오트 쿠튀르를 지속적으로 지원하며 파리는 세계 패션의 중심지가 되었다. 1937년 이런 파리에 발렌시아가가 자신의 이름으로 첫 부티크를 오픈한 것이다. 브랜드 발렌시아가의 시작이었다. 발렌시아가는 스페인에서는 명성 있는 디자이너였지만 프랑스에서는 아직 생소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17세기 스페인 르네상스 대표 화가 벨라스케스에게서 영감을 받은 발렌시아가의 첫 컬렉션은 파리지앵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파리 모드계의 교황이라 불리게 되었다. 다른 많은 오트 쿠튀르 디자이너들이 디자인만 했던 것과 달리, 발렌시아가는 직접 드레이핑과 재단을 하며 손으로 완벽하게 바느질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쿠튀리에로서 인정을 받았다. 

 

패션계의 전설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디자인이 혁명이라고 부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파리 패션계는 크리스찬 디올의 '뉴 룩'이 유행을 주도하고 있었는데, 발렌시아가는 오히려 전혀 반대의 실루엣을 들고 나왔다. 모두가 허리를 조이는 라인을 선보일 때, 발렌시아가는 1947년 허리 부분이 불룩 나온 '와인통 실루엣(Barrel Wine)' 일명 코쿤 라인을 발표한 것이다. 그는 항상 다른 디자이너들보다 10년쯤은 앞서 나갔다. 1940년 디올이 발표한 뉴룩을 발렌시아가는 1930년대에 이미 만들었었다. 뉴룩이 한창 인기를 얻고 있을 때 그는 10년 뒤에 유행할 '색(Sack) 드레스'를 만들고 있었다. 그는 늘 다른 디자이너들보다 앞선 트렌드를 선보였고, 패션지 보그는 이런 그를 '예언의 불꽃'이라 불렀다. 유행을 따르지 않는 발렌시아가는 그 후 러플 이브닝드레스 같은 풍성하고 품이 큰 디자인을 선보이다가 점차 심플하고 직선의 형태의 건축적인 디자인을 선보였다. 그는 매번 컬렉션을 통해 곡선과 직선의 절제미가 빼어난 실루엣을 창조했고, 마법과 같은 재단 기술을 보여주었다. 이 때문에 다른 디자이너들에게 그의 쇼는 하나의 수업과도 같았고 어느새 그는 패션계의 전설이 되어 샤넬의 위치까지 순식간에 올라가 버렸다. 

  발렌시아가의 옷은 여성들에게 완벽한 몸매를 요구하지 않았다. 여성의 몸을 그 자체로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만드는 발렌시아가의 옷은 당대의 여성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발렌시아가는 많은 쿠튀리에들의 스승이기도 했는데, 지방시, 쿠레주, 웅가로 등은 발렌시아가를 그들의 멘토로 여겼다. 크리스찬 디올은 발렌시아가를 모든 디자이너들의 마스터라고도 불렀다. 발렌시아가는 프랑스 오트 쿠튀르에 기여한 큰 공헌이 인정되어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으며 프랑스 패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그러다 그는 1968년 봄 컬렉션을 마지막으로 돌연 은퇴를 선언한다. 1960년대 스트릿 청년 문화의 부상으로 오트 쿠튀르는 점점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그 권위를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발렌시아가의 은퇴는 당시 프랑스를 넘어 전 세계 패션계에 큰 충격이었다. 심지어 그의 VIP 고객이던 한 백작 부인은 그의 은퇴 소식에 충격을 받아 자신의 방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는 1972년 스페인 자택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발렌시아가의 부활

 

  발렌시아가가 없는 발렌시아가는 예전의 왕좌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러다 다시 빛을 발하게 된 것은 1996년, 26살의 프랑스 디자이너 니콜라스 게스키에르를 만나면서부터였다. 놀라운 실루엣과 패턴을 선보이며 발렌시아가를 화려하게 부활시킨 그의 작품 중 대중적으로 히트를 친 것은 '모터사이클 백'이다. 출시되자마자 최고의 잇 아이템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현재도 베스트셀러로 남아 있다. 게스키에르의 발렌시아가는 기존의 심플하고 우아한 실루엣의 발렌시아가에 트렌디하고 강한 여성의 면모를 녹여냈다. 15년간 매 컬렉션에서 새로운 소재와 차별화된 디자인을 선보이던 그는 또 다른 발렌시아가만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고 2013년 하우스를 떠났다. 이후 알렉산더 왕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며 발렌시아가는 세 번째 전성기를 맞이하고 힙한 브랜드로 부상하게 된다. 알렉산더 왕 다음으로 뎀나 즈바살리아가 등장하면서 밀레니얼 세대들의 열광하는 브랜드가 된다. 뎀나 즈바살리아는 이미 베트멍(Vetements)의 수장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던 디자이너였지만 론칭한 지 3 시즌밖에 되지 않은 그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한 것은 패션 업계에서는 놀라운 소식이었다. 우려와 달리, 즈바살리아가 발렌시아가에 데뷔한 그 해에 열린 파리 패션 위크에서  그는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상징적인 실루엣에 대한 존경심, 즉 스트릿웨어 감성을 럭셔리 하우스에 완벽하게 접목시킨 것을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상업보다는 예술을 추구하는 즈바살리아의 패션 철학이 담긴 발렌시아가의 컬렉션 아이템들은 나오는 즉시 대 히트를 기록하며 품절 사태를 일으켰다. 삭스 러너의 원조격인 스피드 러너, 공전의 히트를 친 트리플 S까지 현재의 패션계를 이끌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즈바살리아의 감각은 럭셔리 브랜드부터 스트릿 브랜드까지 모두 아우르게 되었다. 발렌시아가를 소유하고 있는 케어링 그룹은 그룹 안에서 발렌시아가가 가장 높은 매출을 기록하며, 남성들과 밀레니얼 세대들이 폭발적인 호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자신만의 철학을 통해 완벽한 옷을 만들어내는 오트 쿠튀르란 진정 무엇인지를 보여준 발렌시아가. 그가 보여준 완벽한 디자인과 기술에 대한 열정은 몇 명의 디자이너를 거치면서도 여전히 이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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