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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이야기

여행에서 출발한 브랜드, 루이비통

by 마이빈 2022.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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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더리 루이뷔통 트렁크전 중 의료용 트렁크

 

  세계 최초로 사각형 여행 트렁크를 만들어 낸 루이뷔통. 그 후 약 150년간 눈부신 성장을 이루어 오늘날 세계 최고의 명품 브랜드로 우뚝 서게 되었다. 루이뷔통은 전 세계 54개 국가 내 400여 개 매장에서 9671명의 직원이 25억 유로의 매출을 올리는 글로벌 명품 브랜드로 성장했다. 현재는 샤넬, 에르메스와 함께 3대 명품으로 꼽히는 프랑스 명품 브랜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3초 백'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길에서 3초마다 볼 수 있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그만큼 루이뷔통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고, 한편으로 그만큼 소위 짝퉁도 많은 브랜드이다. 만약 이 명품 브랜드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숨은 이야기들을 알면 더욱 재미있고 매력적인 브랜드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루이뷔통의 시작과 최초의 사각 트렁크

 

   '3초 백'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를 끄는 루이뷔통의 뿌리는 사실 '여행'에 있다. 여행용 트렁크에서 시작한 루이비통의 160년 역사를 돌아보는 문구, '비행하라, 항해하라, 여행하라(VOLEZ, VOGUEZ, VOYAGES)'는 여행의 역사를 보여주는 듯하다. 여느 럭셔리 브랜드와 마찬가지로, 루이뷔통도 창업자인 루이뷔통의 이름에서 따왔다. 프랑스 산골마을에서 태어난 루이뷔통은 14살 때 파리에 가고 싶다는 집념으로 대중교통도 없던 1835년에 걸어서 1년 만에 파리에 도착했다. 루이뷔통은 돈을 벌기 위해 마르샬 가방가게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루이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게 되었다. 당시 프랑스의 가방 가게들은 가방 판매뿐만 아니라 여행을 떠나는 부유층들을 위해 짐을 대신 싸주는 일도 하고 있었는데, 루이의 짐 싸는 실력이 수준급이었던 것이다. 그의 실력은 순식간에 소문이 나서 외제니 황후의 전담 패커로 임명되었다. 그 후 왕실에서 쭉 일하던 루이는 1854년 33세가 되던 해 외제니 황후의 후원으로 자신의 이름을 건 여행 가방 가게를 열었다. 그즈음 교통수단이 크게 발달하면서 여행을 떠나는 부유층이 늘었는데, 당시의 트렁크는 뚜껑이 볼록해서 차곡차곡 쌓을 수가 없었다. 이에 루이뷔통은 그레이 트리아논 캔버스로 제작된 사각 형태의 트렁크를 선보였다. 이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사각 트렁크였다. 사각 트렁크는 차곡차곡 쌓여서 짐을 운반하기에도 편리했고, 방수 캔버스를 사용하여 비가 와도 끄떡없었다. 이런 편리한 트렁크 덕분에 왕실에서까지 주문이 쇄도하면서 루이뷔통은 최고의 가방 제작자로 명성을 날리고, 가게를 오픈한 지 5년 만에 공장을 설립해 수백 명의 직원을 거느리게 되었다. 

 

조르주 뷔통과 모조품 방지

 

  루이뷔통도 가족경영으로 이어지며, 1859년 루이뷔통은 아들 조르주 뷔통에게 사업을 물려준다. 조르주도 아버지만큼 아이디어가 넘치고 솜씨가 뛰어난 인물이었는데, 루이뷔통의 성장과 더불어 시작되어 오늘날까지도 모조품, 일명 짝퉁으로 골치를 썩고 있었다. 조르주는 모조품 방지를 위해 1872년 줄무늬 트렁크를 만들었다. 그러나 모조품은 사라지지 않았고, 1888년 브라운과 베이지색의 바둑판무늬로 이루어진 '다미에 패턴'을 세상에 선보인다. 다미에는 프랑스어로 체크무늬를 의미한다. 이것은 오늘날 루이뷔통의 시그니처 패턴이 되었고, 2006년에는 다미에 아주르(화이트와 그레이의 격자무늬)로 재해석되며 다양한 아이템에 적용되었다. 이 시그니처 패턴은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적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루이뷔통의 전통성과 상징성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미에도 모조품 방지에는 소용이 없었다. 당시 귀족과 왕족들은 명품 구입에 푹 빠져 있었고, 루이뷔통을 살 엄두도 낼 수 없는 사람들은 대신 디자인은 같지만 저렴한 모조품을 구매했던 것이다. 이에 조르주는 아버지의 이름 '루이뷔통(LOUIS VUITTON)'에서 L과 V를 따서 LV와 꽃과 별 문양이 조화를 이루는 모노그램을 개발했다. 이렇게 해서 1896년 오늘날 루이뷔통의 상징인 모노그램이 탄생한 것이다. 제품에 브랜드의 로고를 프린팅 한 것은 세계 최초였다. 조르주의 모조품 방지를 위한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모노그램을 상표 등록하여 모조할 수 없도록 하였다. 

조르주 뷔통은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다양한 트렁크를 만들었다. 티 세트 트렁크, 타자기를 보관하고 운반할 수 있는 트렁크, 침대 트렁크 등 다양한 종류의 트렁크를 개발했다. 세계 최초의 사각 트렁크의 명성답게 내구성도 튼튼하기로 유명했다. 실제 조르주는 내구성을 테스트하기 위해 사막을 횡단하기도 했다. 

 

루이뷔통의 위기와 LVMH

 

  제2차 세계 대전 후, 에르메스가 여행 산업에 발빠르게 대처했듯 루이뷔통도 시대의 변화를 깨닫고 있었다. 차를 타고 하는 가벼운 여행에는 크고 딱딱한 트렁크가 필요 없었던 것이다. 조르주의 아들 가스통 루이뷔통은 부드러운 모노그램 캔버스를 만들기 위한 연구에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1932년 가스통은 모노그램 캔버스로 된 첫 번째 소프트백 '노에'를 론칭했다. 가스통의 아들 클로드 루이뷔통 역시 계속해서 소재 연구를 해 나갔다. 그리고 그는 1959년 면과 같은 부드러운 소재로 된 모노그램을 완성했다. 소재가 부드러워지자 디자인에 대한 제약이 사라졌고, 다양한 디자인의 백이 출시됐다. 소프트 백은 트렁크에 비해 가격도 저렴하고 일상생활에서 편하게 사용할 수 있었기에 사람들은 루이뷔통에 열광했고 그 인기는 아시아로까지 뻗어나갔다. 이렇게 전 세계로 뻗어나간 루이뷔통은 1985년에는 처음으로 가방에 선명한 원색을 도입한 '에피' 라인을 론칭하며 그 성공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루이뷔통에게도 위기의 순간이 찾아왔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촌스러운 브랜드로 인식되기 시작하고 결국 경영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가족경영의 위기 속에서 베르나르 아르도가 이끄는 헤네시 그룹에 편입되어 LVMH로 다시 태어났다. 1987년 LVMH가 출범했고, 1997년 루이뷔통의 새 아트 디렉터로 마이 제이콥스가 오면서 젊은 감각을 지닌 브랜드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마크 제이콥스는 곧 의류 라인을 출범하면서 큰 호평을 얻었고, 기존의 루이뷔통과 다른 산뜻한 '베르니' 라인을 만들었다. 모노그램 소가죽 위에 에나멜을 코팅한 베르니는 불어로 '반짝이다'라는 뜻이다. 2001년에는 루이뷔통의 첫 주얼리로 선보인 '참(Charms)' 스타일 팔찌에서도 다이아몬드가 박힌 '귀여운 루이뷔통 가방, 파리의 에펠탑, 비행기 미니어처' 등을 달아 젊은 감각을 표현하였다. 마크 제이콥스는 특히 백을 디자인 함에 있어서 유명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통해 루이뷔통 백을 파격적으로 변화시켰다. 

  현재 루이뷔통의 헤드 디자이너는 니콜라 제스키에르로 2013년부터 마크 제이콥스의 뒤를 이어 자신만의 버전의 루이뷔통을 선보이고 있다. 루이뷔통 브랜드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기발한 아이템이나 예술 작품과의 협업을 통해서도 루이뷔통만의 정체성과 전통성은 유지하며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지켜온 루이뷔통은 세월이 흘러도 럭셔리 브랜드로 자리를 굳히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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