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를 대표하는 패션 브랜드 디올은 1947년 프랑스의 디자이너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이 파리에서 만든 럭셔리 패션 브랜드이다. 브랜드를 창립한 후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크리스찬 디올이 직접 디자이너로 활동한 기간은 겨우 10년 남짓이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그는 프랑스 패션계의 유행을 주도했으며 혁명적인 디자인 등으로 의복의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들을 쏟아냈다. 현재 LVMH 그룹에 속해있는 크리스찬 디올은 의류를 비롯하여 화장품, 향수, 액세서리 등 다양한 라인을 선보이고 있으며 남성복 라인 디올 옴므로 남성들에게도 환영을 받고 있다.
브랜드 디올을 이끈 크리스찬 디올의 생애와 획기적인 디자인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자.
크리스찬 디올의 유년기와 브랜드 디올의 시작
크리스찬 디올은 1905년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많은 디자이너들의 어린 시절이 가난하고 불우했던 것과 달리 크리스찬 디올은 부르주아로서 행복하게 자랐다. 꽃으로 장식된 집 안에는 꽃향기와 은은한 향수 냄새가 항상 감돌았고, 크리스찬 디올은 세련되고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아무 걱정 없이 자랐다. 1910년 크리스찬 디올의 가족들은 파리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 당시 그의 꿈은 건축가로 파리의 미술관을 즐겨 찾으며 문화를 즐겼으나, 부모님의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정치학과에 입학을 했다. 학교도 겨우 졸업하고 예술에 대한 꿈을 접지 못한 채 방황하던 디올은 1928년 부모님의 지원으로 아트 갤러리 '자끄 봉장'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러나 3년 뒤, 엄마와 형이 사망하고 세계 대공황의 영향으로 아버지의 사업마저 파산하고 말았다. 고생을 모르고 자란 부잣집 도련님 디올에게 갑자기 닥친 이 모든 비극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결국 갤러리도 문을 닫고, 집도 없이 떠돌며 드레스나 모자 일러스트를 그려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다 디올은 1938년 로버트 피제의 부티크에서 보조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의류 디자이너로 일하게 된 그는 많은 것을 배우며 실력을 쌓아 나갔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 다시 파리로 돌아온 것은 1941년. 그는 뤼시앵 를롱의 부티크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함께 일하며 경력을 쌓은 동료들이 바로 피에르 발맹과 지방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릴 적 친구의 소개로 섬유 업계의 왕 마르셀 부삭을 만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디올의 재능을 알아본 부삭의 지원으로, 1946년 파리 몽테뉴 30번가에 그의 첫 오트 쿠틔르 하우스 '크리스찬 디올'을 열게 되었다. 이것이 브랜드 크리스찬 디올의 탄생인 것이다.
디올의 뉴룩
1940년대 파리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패션의 선두 주자인 파리지앵들마저 딱딱하고 남성적인 의상을 입었다. 게다가 그간 파리의 패션을 주도해 오던 샤넬의 영향으로 많은 여성들이 실루엣이 단조롭고 장식이 없는 옷을 즐겨 입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사회에는 평화가 찾아왔고 패션에 대한 여성들의 인식도 점점 바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7년 크리스찬 디올의 첫 컬렉션이 열렸고, 사람들은 의상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뉴 룩(New Look)'이 탄생한 순간이다. 부드럽게 떨어지는 어깨선과 부러질 듯 가는 허리 라인, 종아리까지 꽃잎처럼 퍼지는 스커트는 여성스러움의 절정이었다. 수많은 신문과 잡지들이 그의 쇼를 극찬했고, 패션지 '바자'의 편집장에 의해 뉴 룩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디올은 어려서부터 꽃을 좋아했다. 뉴 룩의 원래 이름은 '코롤(Corolle;꽃부리)'이었지만 자연스럽게 뉴 룩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름 그대로 여성복의 실루엣을 완전히 뒤바꾼 새로운 실루엣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샤넬이 없애 버린 코르셋과 페티 코트를 부활시켜 여성의 몸매를 상품화한다는 반발도 일어났지만, 뉴 룩은 당시의 시대 상황과 맞아떨어지며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여성들은 전쟁으로부터 억눌렸던 표현의 욕망을 뉴 룩으로 폭발시켰고 이 로맨틱하면서 사치스러운 옷은 여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디올은 뉴 룩 이후에도 H라인, A라인, Y라인 등 다양한 알파벳 라인을 선보였다. 이렇게 디올을 시작으로 프랑스는 오트 쿠튀르의 황금시대를 열게 되었다.
미스 디올과 레이디 디올 백
디올은 첫 컬렉션과 동시에 첫 향수 '미스 디올(Miss Dior)'을 발표했다. 그는 패션쇼가 열리는 부티크 전체에 미스 디올을 뿌려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꽃 향기를 가득 담은 미스 디올은 황홀하고 우아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향이었다. 디스 디올은 그의 동생이자 정원사였던 카트린 디올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정원에서 은은한 꽃향기를 맡아오며 오감으로 예술을 흡수했던 그가 자신의 향을 디자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디올은 첫 향수의 성공으로 향수 산업을 대중화시키고 이후에도 꾸준히 새로운 향수를 출시했다. 디올은 이런 말을 남겼다. '여인의 향수는 그녀의 손글씨보다 그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디올의 가방 중 대표적인 것을 뽑으라면 레이디 디올(Lady Dior) 백을 빼놓을 수 없다. 레이디 디올 백은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 덕분에 다시 태어난 가방이다. 크리스찬 디올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후, 디올 하우스는 이브 생 로랑, 지안프랑코 페레, 존 갈리아노를 거쳐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까지 많은 디자이너들과 함께 하고 있다. 디올의 시그니처 백이 된 레이디 디올 백은 지안프랑코 페레가 디자이너로 있을 때 탄생한 가방이다. 1995년 프랑스를 방문하는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위해 프랑스 영부인은 그 당시 신상 가방인 '슈슈'를 선물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선물 받은 레이디 디올 백과 함께 공식석상에 자주 등장했고, 그녀의 패션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디올의 '슈슈'가방은 레이디인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존경하는 뜻을 담아 '레이디 디올'로 이름까지 바뀌게 되었고, 현재까지 베스트셀러 가방으로 존재한다.
현재까지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브랜드로 발전해 나가고 있는 디올의 클래식함은 세월이 흘러도 계속해서 여심을 저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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